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생단 사건 (문단 편집) == 북한과의 관련성 == 이 사건은 [[북한]] 체제의 성격과 핵심지도부 인맥, [[주체사상]] 성립에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3년간의 반민생단 투쟁으로 만주 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중견 간부들의 씨가 말라버리면서 지도부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더불어 조선인 사회의 민심이 흉흉해진 것도 당연지사. 이것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2-30대의 젊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발탁해서 간부층의 공백을 메우고 조선인들의 성난 민심을 달랬는데 이들 중 선두주자가 바로 [[김일성]]과 [[김책]]이다. 특히 김일성은 이후 [[보천보 전투]]를 주도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김일성]]도 민생단 사건이 터질 무렵 동북항일연군 간부여서 민생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할 뻔했는데 이 사건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활동 중이었고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소환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일성은 자칫하면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중국인 [[왕윤성]]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김일성이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에 중국인 간부에게 자신이 민생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중국어로 항변하여 설득해서 간부가 처형을 면하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6.25 전쟁]]에 북한을 지원하러 나간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이 중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믿음이 간다고 회고할 정도로 김일성은 중국어를 잘 했다. 해방 이전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이미 친분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를 편성할 때 처음에는 중국과 국내의 우수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2연대를 사단 주력부대로 편성할 생각을 했다가 마안산 밀영에 가서 마음을 바꾸고 민생단 혐의 때문에 전투대오에서 배제된 100여명의 대원들로 새 사단 편성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김일성이 새 사단을 편성하기 위하여 미혼진을 떠나 마안산지구에 이르렀을 때에 새 사단의 모체로 되어야 할 2연대는 교하 방향으로 가고 없었고 앞서 말한 100여 명이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김일성이 오는 걸 보고 자신을 처형하러 오는 줄 알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김일성은 이들에게 민생단 혐의를 없던 것으로 하고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 대오에 넣겠다고 선포하고 민생단 문서 보따리를 소각해 버린 뒤 이들과 관련 유족들을 포섭해 주력부대로 편입시켰다.[* 이 이야기는 [[북한 영화]]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다뤄진다. 북한 영화 〈[[조선의 별]]〉에서는 눈 쌓인 산골에서 조선인 중국공산당원들이 반민생단 투쟁을 빌미로 노인,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총살하려고 했던 찰나에 백마를 타고 나타난 김일성이 처형을 몸으로 막고-- 죽지 않고-- 민생단 문서를 불태운 뒤 인민들의 환성 소리를 뒤로 하고 떠난다.] 말하자면 민생단 혐의를 입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김일성에 의해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로 편입되어 후에 북한 요직에 앉아 김일성파, [[백두산]] 줄기파를 형성한 핵심 간부들이 김일성을 "어버이 수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 세뇌교육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김일성을 정말 어버이로 인식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게 가능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후 김일성은 이들을 통해 타 세력을 종파라고 숙청하고 부자세습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했다. 그야말로 [[동물농장(소설)|동물농장]]의 [[나폴레옹]]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이 민생단 사건 당시 김일성이 호되게 고생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중국에게 아쉬운 것이 있을 때 중국 측 대표한테 반민생단 투쟁을 언급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1932년부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주보중과 같은 이들과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일제 패망 직후인 1947년 무렵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한테 밀려서 한때는 만주로까지 몰릴 만큼 위태로웠는데 당시 중국공산당 휘하에 있었던 조선인 병사들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많은 활약을 벌였으며 내전의 승리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후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됐다. 최소 2개 사단 정도 규모의 이 병력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으며 6.25 전쟁 초기 북한의 남침 당시 주력부대이기도 했다. 1950년 중국이 북한에 병력을 보내기 전 마오쩌둥이 한 말은 ''''과거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국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였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